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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0. 20世 〉7. <부정공>통훈대부의금부도사공휘만근묘갈명(通訓大夫義禁府都事公諱滿根墓碣銘)
1. 문헌 목록 〉20. 20世 〉9. <부정공>통정공휘득엽가장(通政公諱得燁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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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정공>괴헌공휘연근가장(槐軒公諱演根家狀)
槐軒公諱演根家狀 賢乎哉吾從叔槐軒公之勤學好禮孝親敬兄推已及人篤倫察理之造詣得正實有所受於明道程先生學制中篤志好學材良行修忠信孝悌廉耻禮讓誘夜掖激勵漸摩成就本於人倫明乎物理之法門推尋八德路脉於此孜孜不怠德業學行足爲師表於儒門豈不賢乎哉賢而狀其行盖古也而以若吾從叔之賢尙闕其狀者見今世衰道微子又晩育未學不能自述而亦不知因人爲成己也從姪炳寬是爲之懼粗叙其平日見聞所及畧此爲狀從叔玉川趙氏諱演根初諱亮根字景重號槐軒始祖諱璋興於高麗中葉爲檢校大將軍門下侍中傳三世封玉川府院君號農隱諡忠獻諱元吉生前副正號虔谷諱瑜至孫井邑縣監相好亭諱智崑曾孫泰仁縣監諱大承生訓練院奉事諱珏生通德郞丙子義士諱義吉歷三世高祖諱重命曾祖廷仁祖諱河祥考諱永寶妣光山金氏道源女文肅公周鼎后 高宗壬申七月十五日從叔岳降之辰也性行仁厚端潔品質明敏慈良才須以學學須以正家貧親老舍伯亦以沈痼咳喘不克幹家所以未專尋數餘力對冊尋思究讀夜以繼畫課讀訖至於古經詞義往哲格言國乘野史古今奇聞覽即有記聽必成誦見習日深知行日進爲儕流莫及焉嘗有秋城長德松湖金丈從師蘆沙奇先生望重士友聞從叔攻學淸苦妻以其孫女有如桓少君故事於是松翁之敎日效不倦之仁從叔之學日則不厭之知其丁寧告戒於受授之間者詎假量乎書之贈以紫陽後學大明遺民八字揭于書室可知其遠大之期也辛卯春夏讀書于福州之桃川藝業有進同硏皆嘆其篤學焉自是歲秋冬以後癠患彌留憂形于色不翔不矧專以迎醫合藥爲事然遵奉舍伯指導母敢白專而暫不離側所患在於亂昡不抖擻故不知屎尿之出不知寢膳之時或不冠不屨徊徨村衢從叔時澣下衣淨刷房舍不見汚穢於人當寢則爲設枕簞而假寢于側當饍則爲匙飯羹而納口爲著魚肉而着齒使得咀嚼咽吞當徊徨村衢則扶之而隨之三載如一日自家而里自里鄕無不稱其天性之本於孝也舍伯亦嘆我猶在病未共侍湯弟獨殫誠至此甚憫憐矣竟以甲午正月七日遭巨創從叔痛嘆誠不能格天未得復常奄至於此斫指進血獲甦移時乃至屬纊攀號擗踊叩呌未逮即設襲奠第三日大歛第四日成成服奠舍伯亦盡哀盡誠一遵禮制殯塗乃成是古人三日不怠者也吾家之臨喪不作佛事畧倣禮經多從此始焉哭無時而朝夕哭朝夕奠上食踰月喪禮成題主奠虞卒哭祔祥禫吉無違禮過吉而始食乾飮醴噫吾從叔之自侍湯至服闋六年間竭誠盡哀謹禮之至孝篤行孰不謂讀書之賢者哉幸有母夫人在堂舍伯亦在室定省而盡哀奉保以篤于於是母夫人氣力尙爲康健舍伯宿崇亦無他攝家室稍爲平康矣慈主與兄嫂爲悶幾年廢讀至辛丑秋携書送天台釋室而讀之四子三經無不講貫而詩三百篇尤爲反復詠嘆通畫宵無時間斷矣癸卯四月二日遭內艱哀毀盡禮一如前喪日省于墓不以署寒風雨廢伯氏欲卜考妣吉壙八葬于他人先壟禁界彼禁人感從叔辭氣愿款不至督掘或有訟于官官亦不掘其爲積誠竭力非人所及也乙巳二月十四日伯氏未終母夫人喪而臨歿甚加痛割其於送終象生之節一與丘嫂裁正以致無憾焉時二姪幼撫育敎導長姪成人孰産後携妻子八龍門山中買屋而捿息焉一以講學授徒爲巳任隣友亦多有切偲之交也事行具載於昇平誌孝行薦與宗黨灘雲翁學洙所撰槐軒記甲寅夏月偶患泄痢數月沈痛至七月二日命戒子姪曰吾病終不可醫此里亦爲客地歸終于龜湖大宅戶뵦間爲正也即爲輿疾而下乃以四日考終享年四十三葬于大光洞禦口上達淃洞辛坐原配原州金氏堯英女斗岩應南后戊辰十月二十七日生戊辰十一月十五日卒墓祔育一男炳喆孫二男一女男淵培淵眞女幼嗚呼吾從叔心正而意誠言溫而氣和智圓而行方德備而才良見聞博而達古通今進退肅而俯前揚後敬長慈幼而家道正忠告善導而友交信在家而信如蓍龜在鄕而仰若砥假之以壽卒究緖蘊闡弘斯道非但使吾家少輩漸知孝弟禮義之方將有補於通學之用壽師傳矣痛恨曷極炳寬之於從叔不啻同堂叔姪之親師以事之可以服勤無方故其福州讀書之年陪案從之天台講學之秋負笈從之有疑則仰質之有過則俯規之共期勗勉矣今距從叔之世爲二十七歲而當其時從叔之死固可痛也至今日從姪之不死亦可痛也世道之變一至此哉嗣子炳喆移鄕土於數千里亦可恨也即爲叙此如玆以屬其次姪炳浚而藏之俾供立言君子將加修潤之資焉 從姪 炳寬 謹述 괴헌공휘연근가장(槐軒公諱演根家狀) 어질도다 우리종숙 괴헌공의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예를 좋아하며、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을 공경하며、 자기몸을 미루어 사람에게 미치며、 천륜을 두텁게 하고 이치를 살핀 공부가 바르니 진실로 명도선생 학제중에 받은바 있어 뜻을 독실이 하여 학문을 좋아하며、 자품이 어질어 행실을 닦고 충신 효제하며、 염치 예양하고 점점 자라 성취하여、 인륜에 근본하고 물건의 이치를 법문에 밝히고 팔덕노맥을 이에서 찾아 부지런히 힘써 덕업과 학생이 족히 유문에 사표가 되니、 어찌 어질다 아니 하겠는가 어질어 그 행실을 쓴것은 옛부터 있는일로、 우리 종속의 어짊으로서 아직 그 장문이 없는것은 이제 세도가 쇠미하고 아들을 늦게 두어 배우지 못하여 스스로 기술치 못하고、 또한 사람을 인연하여、 일을 잃을줄 모르기 때문이다。 종질 병관이 이를 두려워하여、 그 평일에 보고 들은바를 갈략히 기술하여 장문을 삼으니 종숙은 옥천조씨로 휘는 연근이요 초휘는 양근(亮根)이며 자는 경중(景重)이고 호는 괴헌인데 시조 휘 장(璋)이 고려 중엽에 일어나 검교대장군 문하시중이 되고 삼전하여 옥천부원군 호 농은 시호 충헌 휘 원길(元吉) 생전부정호 건곡 휘 유(瑜) 손자 정읍현감 휘 지곤(智崑) 증손 태인현감(泰仁) 휘 대승(大承) 생훈련원 봉사 휘 각(珏) 생 통덕랑 병자의사 휘 의길 삼대를 지나고 고조 휘 중명(重命) 증조 정인(廷仁) 조 하상(河祥) 고 영보(永寶) 비는 광산김씨(光山金氏) 도원(道源)의 따님으로 문숙공주정의후(文肅公周鼎后)였다。 고종(高宗) 임신(壬申)(一八七二)년 七월 十五일은 종숙의 생일인데、 성행이 인후 단결하고 품질이 명민 자량하여 재주느 마땅히 배움을 성취하고 학문은 반드시 바르게 하였다。 집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었는데 형님이 숙종인 해천으로 능히 집안일을 맡아 보지 못하니 오로지 수를 찾지 못한바 남은 힘으로 책을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 읽기를 주야로 계속하여 과정을 다 읽으면、 기타 외과서에 이르기 까지 보면 곧 기록하고 들으면 반드시 외우니 견습이 날로 깊고 지행이 날로 진취하여 학우의 미치지 못한바 되었다。 일찍 담양에 큰 덕행이 있는 송호 김장이 노사 기선생을 스승으로 모셔 명망이 있는 선비로 종숙의 청고하게 학문한다는 말을 듣고 그 손녀서를 삼으니 환소군(桓少君) 고사와 같았다。 이에 송송의 가르침이 날로 성의를 다하고 종숙의 배움이 독실하니 그 주고받은 사이에 정녕이 훈계한 것은 어찌 가히 헤아리겠는가。 자양(紫陽朱子)후학 대명유민 이라는 여덟글자를 써주어 서실에 걸었으니 가히 그 원대하게기망한 것을 알겠도다。 신묘(辛卯)년 춘하에 복주도천에서 글을 읽어 학업이、 진취하니 동료가 다 그 독학을 감탄하였다。 이해 가을 이후로 친환이 오래 떠나지 아니하니、 근심한 안색으로 출입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며 오로지 의원을 맞이하여、 약쓰기를 일삼으나、 그러나 형임의 지도를 받들고 감히 전단 아니하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병환이 어지러운 현기증 이라 진독치 아니한 관계로 대소변 나온줄을 모르고、 자고 먹을 때를 모르며 혹 관을 안쓰고 신도 않신은채 마을을 돌아 다니니 종숙이 때로 속옷을 세탁하고 방을 깨끗이 청소하여 더러운 것을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잘 때에는 벼개와 자리를 깔아 드리고 곁에서 거짓으로 자며 식사때는 밥과 국을 수저로 떠드리고 어육을 젓가락으로 집어 넣어 드렸다。 마을 거리를 돌아 다닐때는 붙들고 따르기를 三년을 하루 같이하니、 향당이 하늘이 난 효자라 칭송하고 형님이 또 내가 병이들어 시탕을 함께 못하고 아우가 홀로 정성을 다하니 심히 애련하다 하였다。 마침내 갑오(甲午)년 一월 七일에 거창을 만나 종숙의 지성이 능히 하늘에 이르지 못하여、 쾌히 회복 못산것을 통탄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으니 잠시 회생하였다가 다시 운명하니 부여잡고 부르짖으며、 가슴을 두드리고 뛰며 두들고 부르짖어도 말리지 못하니、 즉시 영좌를 설치하고 소렴대렴 성복을 차례로 행하며 예제에 따라 집상 하였다。 『아! 슬프다 우리 종숙의 시탕으로 해상까지 六년간 정성을 다하고 슬픔을 다한 지극한 효도와 두터운 행실은 누가 글 읽는자의 어짊이라。 이르지 아니하리요。 다행이 모부인이 집에 계시고 형님이 또 집에 있어 문안하고 슬픔을 다하며 받들고 안보하여서 우애하니 이에 모부인 기력이 강건하시고 형님의 숙증이 또다른 탈이 없어 집안이 좀 평안하였다。 자친이 형수와 더불어 몇년간 폐독한 것을 민망이 생각하여 신축(辛丑)년 가을에 책을 가지고 천태암에 가서 四서三경을 읽으며 강하여 알지 못한것이 없고 시 三백편을 더욱 반복하여 읊으고 탄식하며 낮과 밤을 통하여 시간의 간단이 없었다。 계묘(癸卯)년 四월 二일에 내간을 당하여 슬퍼하고 예를 다하기를 먼저 초상때 같이하며 날마다 성묘하고、 백씨가 고비의 길지를 찾아 다른 사람 선산 금계에 장사하되 그사람이 종숙의 사기가 정성함에 감동하여、 파내기를 독촉하고 관청에 제소해도 관도 또한 독굴 아니하니 그 정성을 쌓고 힘을 다한것은 사람의 미칠바 아니였다。 을사(乙巳)년 二월 十四일에 백씨가 탈복하기 전에 졸하니 심히 활반지통을 더하고 그 송종상생의 절차를 큰형수와 함께 처리하여 유감이 없게하며、 그때에 조카 형제가 어리니 어루만저 기르고 가르쳐 인도하여 큰 조카가 성인이 되어 집산한 뒤에 처자를 이끌고 용문산중에 들어가 서식하고 후학교도를 책임으로 하니 이웃에 있는 것이 힘써 사귀고자 하는자 많았다。 사행이 승평지 효행편 및 탄운옹 종당 학수(學洙)의 지은바 괴헌기에 자상히 실렸다。 갑인(甲寅)년 여름에 우연히 병이들어 여러달을 고생하다가、 七월 二일에 자질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병은 끝내 고치지 못하겠고、 이마을 또한 객지라 귀호 큰댁에 돌아가 죽는것이 정당하다하고 곧 병을 무릅쓰고 내려와 四일날 고종하니、 향년이 四十三세요。 대광동 어구상 달황동 신좌원에 장사하고 부인도(原州金氏) 요영(堯英)의 따님으로 두암(斗岩) 응남(應南)후인데 무진년 十월 二十七일에 졸하니 묘소는 부장 하였다。 아들은 병철(炳喆)이요 손자는 연배(淵培) 연진(淵眞)이다。 『아! 슬프다 우리 종숙이 마음이 바르고 뜻이 지성하며、 말이 다시고 기색이 화하며 지혜가 원만하고 행의가 방정하며 덕이 갖추어 지고 재주가 어질며、 견문이 넓어 옛일을 통달하고 이제는 통하여 진퇴가 엄숙하며 앞으로 엎드리고 뒤로 드날리며 어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함에 가도가 바르고 충고 선도하니、 벗이 믿고 사귀며 집에 있으면 점치는 점대같이 믿고 고을에 있으면 주초돌과 기둥같이 우러러 보니 만일 장수하여 쌓인 포부를 풀어 이도를 크게 찬양 하였으면 다만 우리 집의 여행이 아니라 향방에 보탬될것인데、 슬픈한을 어찌다 하겠는가。 병관(炳寬)과 종숙의 사이는 동당숙질의 친족일뿐만 아니라、 스승으로서 섬겨가히 비할바 없이익혔는 고로 그 북주서 글 읽든 해는 책상을 지고 배종하고 천태암에서 강학할 때는 책을 지고 따라 의심이 있으면 우러러 질문하고 허물이 있으면 엎드려 간하여 함께 근면하기로 기약하였으니 이제 종숙이 간해가 二十七년인데 그때 종숙의 죽음을 당하여는 진실로 가히 슬펐으나 이제 종질이 죽지아니한것도 또한 슬프다。 세도의 변역이 이에 이를 것인가。 사자 병철이 고향을 수천리 밖에 옮긴것도 가히 한스럽다。 곧 이를 이와같이 서술하여 그다음 조카 병준(炳浚)에게 부탁하여 수장케 하고 군자의 말을 바르게 닦고 꾸미기를 더할 자료로 제공함。 종질(從姪) 병관(炳寬)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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